Page 206 - 나무이야기여행_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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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백나무  바로  뒤의  금사정(錦社亭)은  1520년대  말부터  1530년대  초쯤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니까 수령은 약 500년이 되지요. 훈구파의 모함으로 1519년(중종 14), 남곤,
            홍경주, 심정, 조광조 등 사림파 신진세력 70여 명이 화를 당한 기묘사화가 발생했습니다.
            이에 나주 출신 성균관 유생 11명이 이들의 구명을 위해 유생 200여 명의 호응을 얻어
            집단상소를 올렸는데요. 중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고향으로 귀향해 은둔생활을
            하면서도 결의를 다지며 심게 된 것이 이 동백나무의 사연이 됩니다. 그들은 금강

            11인계(금강계)를 조직하고 영산강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금사정을 세우고 시대의
            비정함을 한탄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변치 않는 절개를 상징하는 동백나무를 심어 훗날을 기약했지요.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정자 설립을 기념하여 뒤로는 대나무를 심고 앞뜰에는 동백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고 합니다.
               옛사람들이 좋아했던 절개의 상징인 송죽매가 아니라 왜 동백나무를 심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아요. 아마도 사시사철 푸르른 동백나무의 잎처럼 뜻을 잃지 말고 지조를

            지켜내자는 다짐에서 심었으리라 추측한답니다. 이에 그들은 금강계를 통해 서로의 우의를
            돈독히 하였고 지금까지도 해남김씨와 나주오씨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금강정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1665년(현종 6)에 중건되었고 건물이 낡아
            1869년(고종 6)에 크게 중수하였어요. 백여 년이 흐른 1973년에 복원하여 금사정이란
            편액을 새로 걸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지요. 동백나무는 부귀의 상징인 모란과 같이
            탐스러운 모양새의 꽃을 피우면서 또한 매우 심한 겨울 추위에도 시들지 않는 송백의
            절개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문인 김낙행(金樂行)의 시에서 엿볼 수 있지요.


                  부귀한 꽃이 송백의 절개를 겸했으니 / 눈 속의 나뭇가지에 봄빛이 난만하네
                  게다가 그 열매 음식 조리에 쓰이니 / 보통의 붉은 꽃처럼 교태 부림이 아닐세
                           김낙행, 『구사당(九思堂)』 1권, 「삼가 ‘동백꽃’ 시에 차운하다〔伏次冬柏花韻(복차동백화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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